추락사 (墜落死)
1.
강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도. 마치 원래부터 아무도 없는 장소인 것처럼. 강물에 비치는 커다란 달을 외면하고 페달을 밟았다. 전속력으로, 그 녀석의 집으로. 늘 만나던 놀이터에 몇 시간째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페인트가 모두 벗겨진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이젠 쇠로 된 벽이나 다름없었다.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았지만,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끝이 다가오는 세상에는 법도 질서도 없으니까 고작 잠깐의 편함을 위해 내 유일한 재산을 가지고 ‘보관’이라는 도박을 걸 수 없었다. 숨이 차서 멈추기를 몇 번을 했을까. 비로소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이준! 문 좀 열어봐! 거기 있지?”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야! 문 좀 열어보라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말았다. 녀석도 결국 죽어버린 걸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녀석은 죽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이준이라고 해도 절대로 죽지 않을 거란 법은 없었다. 애초에 법이란 게 더는 없는 세계니까. 법을 집행할 사람도, 법을 지킬 사람도 모두 죽어버린 세계였다.
폭주족. 1년 전만 해도 오토바이를 타는 날라리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이제는 무작위로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사람일 뿐이다. 폭주족이 나타났으니 달아나기로 한 날에 죽어버리면 어떡하라는 거야. 하루만 버티면 되었는데, 간만에 미운 감정이 들었다. 그게 이준을 향한 건지 폭주족을 향한 건지는 조금 헷갈린다. 어쩌면 둘 다인 걸까.
겨우 다리를 일으키고 문을 바라보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떼서 자전거를 들고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올라올 때보다는 조금 편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사람이 죽는 건 이제 익숙해졌다. 사람이 편하게 눈을 감는 걸 보기 더 어려운 시대니까. 그저 오늘 일정이 엉망이 된 게 아쉬울 뿐이다. 그저 혼자인 게 조금 쓸쓸할 뿐이다. 이준이 죽든지 말든지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왔던 길 따라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강가는 여전히 휑했지만, 오늘따라 강가에 비친 달빛이 쓸쓸해 보였다.
2.
혹시나 엇갈렸을까 싶은 마음에 놀이터로 돌아갔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반쯤 무너진 미끄럼틀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나는 유일하게 제 기능을 하는 그네에 올라타서 바람을 따라 왔다갔다 할 뿐이었다. 이제 이 마을도 남아있는 사람도 10명이 안 되는 걸까. 마을에 남아있어야 할 마지막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가족도, 친구도, 집도 사라져버린 마을에 내가 있을 곳은 없었다. 애초에 이 세상도 남아있어 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던가. 하늘은 내 마음도 모르고 끝없이 달을 추락시키고 있다. 달보다 작아진 해가 서쪽으로 기울여가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준이 없어지자 놀이터에 볼 일은 없어졌다. 자연스레 마을에서 벗어나는 일은 홀로 하게 되었다. 이제는 체인마저 녹슬어서 끼릭끼릭 소리가 나는 바구니 자전거만이 곁에 남아버렸다. 오늘은 자전거를 탈 기분이 아니라서 자전거를 끌고 강변을 걸었다. 한때 연인들의 데이트코스로 인기 많던 여기도 이제는 낙엽과 언제 버려진지 감도 안 오는 고물 더미만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강물은 늘 그랬듯이 고요하게 흘렀다. 나도 강이 흘러가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강에 비친 달은 이제 너무 커져버렸다.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다본 하늘은 초라한 태양과 구름에 가려지지 않는 달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 때 인류의 목표였던 달이었는데, 지금이라면 아마 쉽게 갈 수 있겠지. 물론 NASA가 남아있었다면 말이다. 비행기를 띄울 사람도 남지 않은 세상이다. 나는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강을 따라서 걷고 또 걷고, 그리고 또 걷기만 했다. 그러다 보니 해는 지고 있었고 나는 마을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다리 밑 굴다리를 지나게 되었다. 벌써 굴다리로 지나가는 것도 세 번째였다. 이 다리 밑을 지나면 이제 완전히 마을로부터 멀어진다. 나는 뒤를 돌아서 마을을 보았다. 건물도, 거리도 황폐화된 전기조차 없는 이 곳에 마지막 작별을 고하고 자전거를 올라탔다. 굿바이.
3.
강에서, 그리고 마을에서 시선을 돌려 앞을 본 그곳엔 낯선 풍경이 있었다. 마을 밖이라서 낯선 것이 아니라, 시대착오적인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수 개월간 볼일 없었던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하얀 -이제는 때가 많이 타서 회색에 가까운- 원피스를 입은 한 아가씨가 빵모자를 쓰고 붓을 쥐고 있었다. 이질적인 광경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마치 세상의 끝은 오지 않을 것 같은 옷차림은, 마치 내일도 모레도 오늘 같은 하루가 이어질 것 같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여자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면서 굴다리 아래를 지나갔다.
‘아무래도 나와는 관계없는 사람이니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신경 쓰이지 않았다.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강을 따라 자전거를 끌고 천천히 걸어갔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다.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를 줄곧 쳐다보고 있었나 보다. 싱긋 웃어 보인 미소가 신경 쓰였다.
‘이상한 사람’
나는 여자를 뒤로하고 가던 길을 향했다. 자전거를 천천히 끌고. 천천히 걸어갔다.
‘찰카닥’
아슬아슬하던 체인이 결국 빠져버렸다. 내 유일하게 남은 벗이 휴식을 원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굴다리 아래로 가서 정비하기로 했다. 생각보다 더 멀리 가지 못했다. 여자는 다시 나를 보고 빙그레 웃어 보였다. 신경 쓰였다.
나는 여자랑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자전거를 내려두었다.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야 모르는 사람이니까. 이제 와서 알아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조용히 가방에서 공구를 꺼냈다.
여자도 조용히 붓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다리 아래서 보이는 풍경을 그리는 모양이다. 미술에 소양이 없는 나였지만 그게 유화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물론 어디서 그 많은 물감을 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내가 아무 철물점에서 남은 공구를 가져온 것처럼 아무 화방에서 가져온 걸까. 조용히 볼트와 너트를 조이고 싶었지만, 내 하나뿐인 벗은 조용히 하는 법을 몰랐다. 결국 눈치가 보여 조금 떨어져서 작업하기로 했다.
“괜찮아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자전거를 들고 자리를 옮기려 하는 순간이었다.
“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옆에 있어도 된다고요.”
시선은 캔버스에서 떼지 않은 채, 손은 붓을 멈추지 않은 채, 아무렇지도 않게 내 마음을 읽어버렸다.
“아, 네.”
자전거를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뭐가 감사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습관성이었다.
“별말씀을요.”
겨우 신경을 껐는데 또다시 신경이 쓰이고 말았다.
4.
둘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함께이지 않았으니까. 그저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할 뿐이었다. 나는 나대로, 그녀는 그녀대로 자신의 업무를 할 뿐이었다. 자전거 체인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강물 소리 맞춰서 이 장소를 채우고 있었다. 가끔 연필이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사사삭 사사삭 소리가 나쁘지 않았다.
체인의 톱니에 녹이 너무 슬어서 체인을 끼워도 빠지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다른 기어를 이용해야 하는 모양이다. 남은 기어는 가장 큰 톱니뿐이었다. 아무래 페달을 밟아도 속도가 나지 않는 기어. 거의 사용하지 않던 기어라 그런지 유일하게 멀쩡했다. 이제 와서 빠르게 움직일 이유는 없으니까 인제 와서야 이 톱니바퀴에 체인을 걸어본다. 끼리라 리릭. 체인은 빠지지 않고 잘 돌아갔다. 정비가 끝났다. 손은 엉망진창으로 더러워졌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두고 강가에 가까이 가서 손을 씻었다. 강물은 여전히 차가웠다. 늘 그랬듯이. 손에 더러운 것들이 하나하나 씻겨나갔다. 이윽고 지워지지 않는 기름 자국만 남았다. 내 자전거로 돌아가기 위해 등을 돌리자, 그 여자가 내 자전거 앞에 서서 자전거를 살펴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지켜만 보았다. 여자는 여기저기를 움직이면서 내 자전거를 살펴보았다. 앞바퀴, 핸들, 안장, 기어, 체인. 뒷바퀴. 그리고 웃음소리. 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나를 관찰한 모양이다.
“언제까지 거기에 그렇게 서 있을 거예요.”
그러지 않고서는 저 말을 하지 않았겠지.
“자전거 구경은 끝났어요?”
그제야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한 걸음 두 걸음 내 자전거에 다가갔다. 그리고 세 걸음 남짓 남은 순간, 눈이 마주쳤다. 한순간이었다. 갑작스러움에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내 자전거의 핸들 쪽으로.
“자전거 멋지네요.”
어딜 봐도 고철에 가까운 자전거를 두고 그렇게 말했다. 시선이 따가웠다.
“고마워요. 이래 봬도 꽤 아끼는 녀석이에요.”
조심히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래 보여요.”
뚫어지게 쳐다보는 눈망울에서 벗어나기는 그른 것 같다. 비로소 그녀의 눈을 마주 볼 수 있었다. 미소가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5.
“이제 다시 가던 길 가실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목소리에 감정은 실려있지 않은 슬픈 목소리였다.
“아마도요.”
내가 대답했다.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 했다. 우리 사이에는 다시 익숙한 침묵이 찾아왔다. 멋쩍게 웃으며 달이 추락하는 하늘을 보았다. 해가 사라진 밤하늘은 달의 세상이었다. 이태백과 같은 방랑 시인이었다면 낭만적인 시를 한 수 썼겠지만, 나는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았다. 고요하게, 차분하게, 그리고 확실히 떨어지는 달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저 달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아마도 떠나야 하지 않을까.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마을로부터. 그러나 다른 곳에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곧 끝날 예정인, 이 세상이 내가 남겨준 건 더 이상 없었다. 돌아갈 곳도, 떠나갈 곳도, 그리고 있어도 되는 곳도 없었다.
“어쩌면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몰라서 아무 데로도 가지 못할 수도 있어요.”
내가 말했다. 처음으로 내가 먼저 말을 열었다. 아무 감정을 싣지 않으려 했지만, 공허함이 함께 묻어나와 버렸다. 나는 자전거를 등 뒤로 한 채 자리에 앉았다. 올려다본 하늘엔 떨어지는 달을 가리는, 이제는 차가 다니지 않는 다리를 가리는, 나를 내려다보는 한 화가가 자전거 하나를 두고 존재했다. 곧 화가는 고개를 들어 반쯤 무너져 내린 다리로 시선을 옮겼다.
“벌써 해가 졌네요.”
그 말이 유난히 처량하게 들렸다. 쓸쓸함이 담겼다기엔 목소리가 따뜻했고, 슬픔이 담겼다기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외로움이 처량함을 불렀다기엔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다. 그런데도 저 말이 이리도 신경이 쓰일까.
“아무래도 달이 이기긴 했죠.”
“네?”
“이제 달은 지는 일이 없으니깐요.”
종말이 다가온 세상에 걸맞은 종말적인 유머였다. 나름 필사적인 유머였지만, 곧 모두가 필사(必死)할 세상에서 필사적이라는 표현처럼 공허한 표현이 없다. 그럼에도 아직 숨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일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따라서 웃고 말았다. 꽤 오래 웃으면서 내일이 오지 않기를 속으로 빌었다.
“재밌네요.”
웃음 속에 섞인 말 한마디가
“오늘은 어디에도 가지 말아줘요.”
남은 삶 전부를 바꾸어버릴 것이란 걸 알아버렸다.
“물론이죠.”
남은 삶이라고 해 봤자 이젠 며칠도 남지 않았지만 말이다.
6.
화가는 다시 이젤 앞에 앉았다. 나도 따라서 그 뒤에 자전거를 세우고 바닥에 앉았다. 밤이라 바닥이 차가웠지만, 일단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 대신 이젤 위 캔버스를 보는 데에 시신경을 집중시켰다. 지금에 이 장소가 담겨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강물과, 반쯤 무너진 다리, 그리고 하늘에 고고한 달과 함께, 그림을 그리는 본인과 그 옆에 자전거를 고치는 나도 함께 담겨있었다. 생각보다 이곳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림을 처음부터 다시 그렸던가.
“되게 잘 그리시네요. 특히 여기 남자가 잘생기게 잘 그려졌는데요?”
나는 그림 속 자전거를 고치는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래도 신경을 많이 썼으니까요. 얼굴도 안 보이지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시간을 그저 흘려보낼 뿐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 우리 둘밖에 없다는 듯이 굴었다. 실제로 이곳 주변에 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이 끝나기 전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는 게 중요했다. 이준과 함께 멸망한 도시를 방황하면서도 느끼지 못한 기분을 지금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받을 줄은 몰랐다. 곧 사라질 이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보다 새삼스럽지만, 저는 유진이라고 해요. 우리 서로 이름도 몰랐네요.”
새삼스럽게도 유진 씨는 그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앞으로 더 오래 함께할 사람처럼, 통성명했다. 멸망이 예정된 세상 속, 사라진 물건 앞에서 사라진 문화를 지키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인연을 쌓고 관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이제 와서. 이상한 사람이지만 싫지 않았다. 나도 내 이름을 알려주었다.
“준이라고 해요. 이준.”
“근사한 이름이네요. 어쩐지 이름이랑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야 내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이름을 내세울 자신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오늘 죽어버린 내 친구의 이름을 팔아버렸다. 참 쓰레기 같지만, 나를 손가락질 할 사람조차 남지 않았다.
“그래서 어디 가시던 길이었어요?”
아직 신경 쓰고 있었구나.
“제 이야기가 궁금해요?”
7.
오늘 있었던 일부터 역순으로 알려줬다. 이준이라는 이름은 내가 가져버렸으니, 친구라는 직함만 남은 녀석의 죽음부터 이야기했다. 본래 오늘 이준과 만나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밤사이에 폭주족에게 당해버린 모양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폭주족이 있어요?”
폭주족, 예전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날라리를 의미했겠지만, 이제는 그냥 무작위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세상이 끝날 때 나무를 심는 스피노자가 있다면, 세상이 끝날 때도 나무를 베는 사람도 있겠지. 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루나 기다렸지만 약속 장소에도 집에도 없는 거라면 폭주족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아까 가야 할 곳이 없다고 하신 거군요.”
“아무래도.”
짧게 대답했다.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사라진 지금 그 약속이 의미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폭주족을 피해 달아난다고 며칠 더 살까. 어쩌면 몇 시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미치자, 방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이전 이야기도 간단히 했다. 1년 전, 멸망이 발표된 후에도 일상을 지키려던 아버지는 폭주족에게 살해당하고, 멸망이 발표된 후에 자포자기하신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자 따라 죽었다. 마을은 폭주족 무리의 테러가 지난 후로는 무인지대가 되었다. 유일하게 남은 친구도 오늘 죽었다.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른다. 시계가 없으니, 자정이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유진 씨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들으면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그 마을 저도 가보고 싶어요. 그림 완성되면 같이 가요,”
“그래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심장이 놀랐다. 기껏 나온 마을을 다시 돌아가게 될 줄이야. 내 평생 이 마을을 벗어나지는 못하는구나. 거절하지 않은 나 자신에게 심장이 놀랐던 것 같다.
“그림 얼마나 그렸는데요?”
“다 그렸어요. 출발하죠”
유진 씨가 손을 떼고 일어섰다. 누가 봐도 미완성한 그림이란 건 알 수 있었다. 그야 색이 붉고 노란 계열의 색만 칠해져 있었고, 강물은 여전히 하얀색이었다. 그럼에도 유진 씨는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진짜로 다 한 거예요?”
“제가 다 했다는데 다한 거죠.”
당돌한 목소리, 자만스러운 표정, 끝이라는 단호함을 이길 수 없었다.
“거기 폭주족이 날뛰어서 도망쳐 나온 거라니까요?”
“어차피 폭주족은 어디에도 있어요.”
경고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그리고 저 말을 이길 말을 찾지 못했다. 유진 씨말로는 이제 하루도 안 남았다고 한다. 내가, 아니, 이준이 날짜를 여태까지 잘못 세어 온 모양이다.
8.
나는 자전거 뒷자리에 유진 씨를 태우고 마을로 돌아갔다. 이준이 아닌 다른 사람을 태우는 건 처음이었다.
“그림은 안 챙겨도 돼요?”
“당연하죠. 벽화나 그래피티 같은 거니까요.”
나는 천천히 페달을 밟으면서 물었다.
“그런 거치고는 요즘 보기도 힘든 이젤에 캔버스로 본격적이던데요.”
“벽은 금방 부서지니까요,”
암울한 이야기를 하는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유진 씨는 어디서 왔어요? 서울?”
“네, 서울을 벗어나는 건 이번 여행이 처음이에요.”
“저는 서울 가보는 게 꿈이었는데 부럽네요.”
“에이, 서울 뭐가 좋다고, 저는 여기가 더 좋아요.”
시시콜콜한 잡담조차
“아침으로는 뭘 먹을까요?”
“글쎄요 가방에 통조림이 마침 2개 있는데.”
“해가 뜨면 먹을까요?”
“요즘은 달이 대세라서 평생 못 먹겠네요.”
멸망적인 실없는 농담도 마치 멸망 확정 이전 같았다. 마치 멸망 같은 건 없다고, 모든 게 악몽이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지만, 같이 올려다본 밤하늘은 달 뿐이었다. 오히려 꿈에 가까운 건 지금이었다.
“사실 이준이라는 이름은 제가 지금까지 언급한 친구 이름이었어요.”
“그 이름 모를 사이좋은 친구가 여자아이가 아니라서 기쁘네요.”
유진 씨는 키득키득 웃으면서 답했다. 운전해야 해서 뒤를 못 보는 게 아쉬웠다.
“그러면 진짜 이름은 뭐죠?”
“놀이터 가서 알려줄게요. 아직은 부끄럽네요. 이름이 특이해서요.”
“아, 뭐야아, 치사해요.”
“그나저나 이 자전거도 준이가 구해준 거예요.”
“이준 이야기 금지. 그만 듣고 싶네요.”
살짝 삐친 얼굴도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이준 이야기는 그만뒀다. 대신 유진 씨 이야기를 들었다. 유진 씨는 서울에 사는 미대생이라고 한다. 미술을 그렇게 잘하니 미대생일 거라고는 생각했었다. 나는 왜 미술을 하는지 물었다. 그것도 순수미술을. 돈도 안 되고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다. 유진 씨가 또 키득키득 웃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야. 보여주고 싶어서요. 제가 보는 세상의 찬란함을요.”
생각지 못한 답이 돌아왔다. 대충 그림이 좋아서, 혹은 재밌어서 그런 이유가 나올거라고 생각한 내가 한심했다. 그렇구나. 돈이라는 세상의 논리에서 벗어나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구나, 꿈을 좇는 사람은 모두 바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지 않는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어쩐지 그림이 찬란하더라고요.”
“고마워요.”
유진 씨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가슴이 아려왔다. 꿈이 없었던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도 밝고 아름다운 꿈이었다. 마지막 날까지 꿈을 향했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도 언젠가 꿈을 잔뜩 꾸던 소년이었을 텐데. 어쩌다가 이런 청년이 되었을까.
“유진 씨.”
“네?”
내가 갑자기 말을 끊었다. 더 이상의 찬란함을 견딜 수 없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오랜만에, 종말 예정 이후 처음으로 무언가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때늦은 의욕이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일 종말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저, 유진 씨가 보아온 서울이라는 세상을 보여주세요.”
그나마 내게 남아있던 소원을 이야기했다. 진심으로 진심에 부딪혔다. 웃음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좋았다.
“물론이죠. 내일도 지구가 버텨준다면, 서울로 가요. 같이.”
처음으로 지구가 멸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9
“이제 여기 계단 올라가서 길만 건너면 돼요.”
“태워줘서 감사합니다.”
유진 씨의 ‘벽화’가 있는 곳에서 여기까지 생각보다 가까웠다. 그저 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걸었던 것이었나보다. 자전거를 잠시 세워두고 계단을 올랐다. 고마웠어. 자전거, 이준. 세상의 마지막을 함께할 사람을 선택하였다. 우리는 계단을 올랐다. 신난 유진 씨가 느릿느릿 걷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자전거 때문에 숨이 찼지만, 나도 힘을 냈다. 마침내 계단을 다 오르자, 어제 이준과 만나기로 했던 놀이터가 보였다.
“저기인가요?”
“네, 저기예요.”
그녀가 달려 나가자 나는 손을 붙잡고 말했다.
“유진 씨 차 오잖아요.”
“네? 차요?”
이 시대에?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내일 멸망하는 세상에 길 가다 지나가는 차가 있을 리가 없었다. 폭주족이었다. 나는 계단 쪽으로 몸을 던지려 했지만, 법도 상식도 없어진 세상에서 상식적인 사고를 한 내 탓이었다. 차는 나와 유진 씨를 짓밟고 그대로 달아났다. 말 그대로의 폭주족이었다. 나는 계단 위에서, 유진 씨는 계단 아래에서 쓰러져있었다. 모든 기력을 다해서 유진 씨에게 갔다. 걸어가진 못하고 계단을 굴렀다. 온몸이 박살 나는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유진 씨가 앉은 채 다리를 끌고 와서 내가 먼저 하고 싶었던 대사를 빼앗겼다. 다리를 다친 모양이다.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제가 억지 부려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붙드는 게 겨우였다. 얼굴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막아주셔서 감사해요.“
웃음을 지어보려 했다. 성공했는지는 모르겠다.
이름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기침이 나왔다. 식도에서 올라온 피인지 기관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피가 같이 나왔다. 목이 타는 듯이 아팠다.
”이름..“
겨우 한 단어 뱉었다.
”아니에요, 무리하지 마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확실히 무리하고 있었다.
”고마워. 조금 뒤에 봐.“
더 이상은 정신을 붙들 힘조차 없었다. 시야에는 방금 작별을 고한 자전거가 있었다. 이내 시야는 유진 씨의 우는 얼굴로 바뀐다. 그 뒤로 달이 지구에 떨어지고 있다.
안녕하세요.
はい、どうも!
한국어로 소설을 쓰는 한국인 inKrain입니다.
韓国語でたまに小説を書く韓国人のinKrainです。
어쩌다가 '소설가가 되자'를 알게 되서 연재해봐요.
偶然に「小説家になろう」を知って連載して見ます。(笑)
한국인지만! 잘 부탁합니다!
韓国だけど!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