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오국사 연표
주의
여기서 쓰인 것은 너무 허황하고 현실과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제국주의를 칭찬하는 뜻은 아예 없습니다.
1 (서기 2097)
서울 터에 단도(檀都)가 세워졌다.
끝나지 않는 전쟁에서 도망치기 위해 백성이 은신처를 구해 잇따라 이 콘클릿과 아스팔트 사막에 들어가 이 도시는 천천히 큰 세력이 되었다.
단도란 옛날 임금인 단군의 영광을 되찾는 것을 맹세한 이름이다.
31
단도는 한반도를 차지한 정치세력이 되었다.
한반도주청을 진주에 두었다.
단도는 특별한 도시자 단도와 반도 사이에는 여러 격차가 있었다.
45
서기표(徐基標) 장군의 일본 정복.
노시로라고 불렸던 거기는 그후로 서포(徐浦)라는 이름을 지었다.
57
그때 북해도는 세 나라로 이루었더니 동남쪽에 위치한 오시마가 고천원공화국으로 섬을 통일되었다.
첫째 대통령은 시바 테루쿠(斯波輝玖).
고천원은 너무 가난해서 온갖 물자를 단도에서 막대한 끼니를 수입하고야 먹고살 수 있었다.
61
서기표, 열도인 타케이 토시미(竹井俊實)에게 죽었다. 타케이는 단도군에 협력하더니 동료보다 봉급이 낮기 때문에 기표를 미워했다.
70
단도군이 합이빈을 장악해서 이는 그후로 언들판(시베리아)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두보가 되었다.
73
단도가 산동반도 병합.
78
게다가 향항(香港)을 병합.
81
사방택의 반란. 사방택은 오락 목적으로 싸움을 맡은 노예검사였다. 하지만 부자가 그런 일을 그만두고 검사를 죽일까 하는 소문을 들어서 동료와 함께
방택은 단도를 제압하고 다슬렸지만 결국 백성의 지지를 잃고 말았다.
얼마 안 가 내쫓긴 방택은 죽었다.
단도가 큰 피해를 입었다.
부흥을 위해 앞날공업.
그때부터 단도 정치에서의 기업 세력 득세가 시작되었다.
91-92
정균갑(鄭均甲)의 만도(萬島 알류샨) 탐색.
93
독일에 생긴 튀르크 카간국(可汗國)이 유럽 통일. 정부로의 증오를 피하고 민족끼리 다투게 하도록 알바니아, 아일랜드, 스위스 등 몇개 나라는 독립을 유지했다.
94
튀르크 카간국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
96
천도전쟁. 아뢰도도에서 훈련 중 함대가 불운하게도 총돌했다가 우연히 전투로 변했다.
예상도 못한 고천원군의 힘에 놀라서 그후 단도에게 아주 무서운 적이 되었다.
이 전쟁 후 많은 열도인이 자유를 구하며 고천원에 도망쳤다.
102
이상대(李相大)가 일본주에 총독으로서 부임.
상대 정책은 일본주를 한반도와 유사한 땅으로 만들어서 고천원에게 호흥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민 반대가 극심했지만 열도 발전은 이로부터 시작된다.
103
유책(劉策)이 알래스카 침공을 시작.
마을을 태우면서 동남쪽으로 나아갔다. 그가 거느린 병사에게는 많은 열도인이 포함되었다.
알래스카는 훗날 풀찬나라로 개칭되었다.
105
단도군 대만 상륙.
단도 정부가 북쪽에 대해 자세히 연구한 나머지 남쪽 지리에 어둡기 때문에 일본주와 같은 통치에 두었다.
108
단도해군이 제퍼슨 공화국 (Republic of Jefferson) 수도 시아틀을 정복.
단도 함대는 한시 명제독 드레드노트 아사히나(Dwain "Dreadnaught" Asahina)에게 시달렸더니 단도군은 제퍼슨 정부 안에서 불화를 이용해서 아사히나를 자살시키는데 성공.
반도인은 제퍼슨 공화국에서부터 남쪽을 자연 환경 "모래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진겨해협에 고천원군 침공에 대비하여 군사도시 세종진(世宗鎭)이 세워졌다.
111
선대반란(3월-8월). 일본주에서의 최대 반란.
126
9/1 - 9/14 이주간 전쟁.
미리미리 침공을 알게 된 고천원군이 단도 공군 군사기지를 기습해서 단도군은 저항하지 못했다.
바다에서도 우시오 히사(潮久)가 단도해군을 잘 격파했다.
131
단도가 캐나다 동쪽 지방을 카간국에서 구입. 카간국에 그 땅은 넓기만하지만 춥고 황무한 무용지물이었다.
134
단도가 뉴기니섬 정복. 마섬(뜻은 "남쪽 섬")으로 개칭.
죄인이나 포로가 가는 유형지가 되었다. 가혹한 자원 채광 사업을 강요했다.
137
아프리카인 후손인 강준언(姜浚彦)이 모래안의 토목 사업 대신으로 부임. 인종 차별을 멎게 하며 모래안 인프라를 개선했다.
156
군인이자 모험가 전여손(全汝遜)이 산디에고를 차지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단도 남쪽으로의 확대가 멈추었다. 산디에고는 앞으로 반도 땅 이름을 따서 삼척(三陟)이라고 불리게 된다.
198
하드슨만 전쟁(-199).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을 놓고 단도군과 아메리카 카간국이 사나운 싸움을 했다.
이 전쟁에 따라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단도 영토 구역이 확정되었다.
231
발해전쟁.(-234)
발해 개발을 맡은 소야사(小野寺) 그룹과 앞날공업이 허락없이 전투를 시작하며 그가 발해 전체로 퍼졌다.
이 전쟁은 소야사 그룹 사장이 옛 만주국처럼 발해에 자기 나라를 만들려고 한 것에 비롯한다. 소야사 그룹을 세운 사람을 열도인이라기에 열도인의 독립을 다른 땅에서 이루기고자 한 것이다.
사태를 위태로이 단도정부는 두 기업을 겨우겨우 없애었더니 이 사건으로 단도가 기업을 잘 지배하는 힘을 잃게 된 게 밝혀져버렸다.
그래도 길이 단도 경제를 도와주던 기업을 망가뜨린 것은 단도 사회에 고치기 어려운 상처를 주었다.
그때부터 경제 격차가 극대화했다.
238
마섬 독립. 일찍이 고천원 군인이었던 사이바라 쇼스케(西原昌介)와 호시 켐파치(星堅八)가 열도인, 반도인, 선주민을 전동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들어 단도군을 없앴다.
나라 이름을 기니야(義仁谷)로 정했다.
소중한 자원을 단도에 제공해온 마섬의 독립 탓에 단도 경제는 더욱 손해를 입었다.
기니야는 처음은 온갖 민족의 자유화 평등을 존중하는 나라로 시작된 것으로 보였던데... .
240
기업 손순(孫淳)이 기니야 독립을 모래안의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해서 총살당했다.
손순의 활동은 기록이 적었기에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4세기부터 역사가 연구 덕분에 다시한번 주목을 받게 되었다.
254
단도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독재를 원한 군인 와타라이 노부타카(度會信隆)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했다.
삿포로의 중요 시설을 잇따라 점거하고 경찰과 극심한 전투를 했다.
결국 노부타카는 실패해서 천도에 유형에 쳐해졌다.
256
단고전쟁. 단도가 고천원 도록 북해도에 침공했다.
일본주에 상륙한 고천원군이 백성이 단도정부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설득.
단도군이 북해도 국민에게 알려자마자
마침내 단도 여기저기에서 반란이 퍼졌다.
257
대리공화국과 아메리카 카간국이 고천원 편에 가서 싸우기로 했다.
모래안 군인인 김이사부(金異斯夫)는 단도 더 이상 잘 일하지 않겠으리아 여겨서 동쪽에 있는 단도군을 약해지게 만드는 여러 훼방 활동을 시작했다.
259
처음에 고천원군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10월 당진(唐津) 전투 승리로 고천원군은 여러 방해에도 불구하고 단도로 힘껏 나아갔다.
특히 진도 인근에서 커다란 전함 환인(桓因)이 가라앉은 것은 고천원군에 큰 자신감을 주었다.
260
단도 시가전.
8/6 단도 수뇌가 폭탄으로 자폭해서 동네가 불타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많은 병사가 희생되었다.
8/7 기능을 잃은 단도 정부 대신에 조선주 장관에서 불린 강성수(姜聖洙)를 리더로 계림 잠정 정부 성립.
8/22 남녕조약. 남녕에서 단도 정부와 고천원의 전쟁을 정식으로 끝냈다.
이후 단도에 속하던 땅을 시민이 어떻게 다스리는지에 대해 누구든 시끄럽게 의논했다.
단도가 아예 한 도시이고 다른 속주는 어느 정도로 독립한 땅으로 관리되던 것은 정부 소멸에 인한 혼란을 상당히 억제했다. 게다가 각 속주가 자기 정치적 문화적 성격을 긴 지배 안에서 기른 것도 주권 국가로서의 성립을 쉽게 하였다. 시민의 단도가 사라졌음에 대한 인상은 기쁨만이 아니라 복잡했다.
264
1/16 강성수가 고천원이 나타낸 조약 내용에 조인해서 단도 해체가 정식으로 정해졌다.
합이빈 회의. 단도에서 독립한 나라가 정해졌다.
일찍이 단도가 다스리던 땅에 살고 있고 한반도 말과 문화를 받아들인 사람은 앞으로 계림인(鷄林人)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단도가 유지한 막대한 돈을 어떻게 시민에게 주는지가 조선국의 처음 과제였다.
◇
268
조선국에서 단도 고관이었던 육청일(陸淸一)이 국민공화당 결성. 사나운 극우 정당으로 때때로 대국을 흔들었다.
275
애리조나 자치구가 중앙아메리카 연맹으로 승격.
285
조선국에서 단도를 칭찬하는 내용의 책이나 동영상 발표를 금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289
산동반도가 조선국에서 독립. 초대 총독은 정대이(丁大懿).
291
조선국 정치 활동가 고현남(高賢男)이 단도가 아닌 새로운 민족통일 생각으로 대계림주의 주장.
하지만 당시는 나라마다 나셔날리즘을 중히 여겼으니까 백성의 지지를 못 누렸다.
305
태시전쟁. 시베로에서 태평양합중국에 흘러가서 급속히 많아진 이민을 놓고 외교문제가 되어서 전쟁이 되었다.
계림오국끼리 처음으로 전쟁을 한 순간이었다.
306-310
해동 내전. 많은 열도인이 고천원에 망명했다.
316
발해에서 이치양(李致讓) 대통령으로 취임. 야당 전진당을 선거에서 전승에 이끌었다. 342년까지 발해를 독재적으로 다스렸다.
326
기니야 내전. 반도인이 살고 있는 자원을 놓고 큰 전쟁이 되었다.
내전 후 열도인이 반도인과 선주민의 정치적 입장을 낯주었다. 백성은 이 결과를 해동 내전의 복수로 여겼다.
337
튀르크 대카간국에서 프랑키스탄 카간국이 독립. 수도는 파리.
튀르크 대카간국은 말기 나뉘어서 통일성을 잃고 말았다. 얼마 전부터 카간국 중앙정부는 국경까지 통치하는 힘을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여러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다. 고로 몇개의 세력으로 나뉘어 프랑키스탄은 카장 센 부분이었다.
기니야에서 열도인의 추진한 나이토 키스케()가 폭탄 테러에 죽었다. 정부는 반도인의 범행이라 단언해서 탄압은 극심해졌다.
345-347
발해전쟁. 고천원군과 발해 조선 연합군의 전쟁.
처음부터 발해군은 사기가 낮았다.
만주리 전투에서 대패배가 결정타가 되었다.
이 전승 후 고천원은 연해주 지역을 차지했고 조선국의 경제는 나빠져서 많은 실업자가 나타났다.
351
고천원과 해동 사이에서 일본연합이 성립했다.
하지만 이것은 대등한 상관에서 매우 멀었다. 군사고문은 거의 고천원이었으며 해동은 벌어야 했다.
해동 국민은 실망해서 항의를 시작했다.
353
12/31 고천원의 인기아이돌 후지사와 미치루(藤澤みちる), 라이브에서도 고천원 정부가 추진하는 일본연합 구상을 비판했다. 군부와 정부는 그녀를 비판했지만 시민은 지지했다.
그후로 고천원 국내서도 일본연합 비판이 성행했다.
355
해동의 영토였던 향항이 대리에 함락.
일본연합 해소. 고천원군이 해동에서 철퇴했다.
359
고천원이 태평양 군부와 비밀로 간섭해서 쿠데타를 전동하고자 한다.
361
8/5 김해도 사건. 기니야 열도인 당국이 반란의 혐의로 주민을 학살.
365
기니야에서 반반도인 무장조직 "경휴여단" 결성. 호칭은 일찍이 단도에 저항하던 금강 장군 신경휴(申鏡休)에 비롯된다.
366
7/12 조선국에서 극우단체 의사당이 국회에 돌입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사건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지어서 공태직(孔泰稷) 대통령이 사임. 의사당은 국민공화당에서 나뉘어 성립하고 폭력 혁명에 따른 단도 부흥을 소망했다.
11/4 태평양합중국 군사쿠데타. 계획한 자는 육군 대장 왕한영(王翰榮).
김이사부의 손자인 김충안(金忠安)이 한영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
381
초록도를 놓고 시베로와 프랑키스탄이 전쟁을 한다.
384
박충겸, 발해 대기업 사장부인과의 불륜이 들켜서 사임.
385
한국신이 조선에서 추방되어서 발해로 도망쳐나왔다.
386
왕한영이 그냥 정치대체를 유지하는지에 대해 국민투표를 한다. 투표 결과로 한영이 독재를 마무리해서 태평양 민주화.
388
고천원 대통령 쿠로키 마사미치(黑木正道) 계림오국에서의 계림인의 독점을 비판한다.
396
5월 고천원 신문기자 아사미 카츠토시()가 고천원과 기니야가 남북에서부터 조선과 해동을 공격하면 된다고 주장.
398
이수량이 죽어서 송위진(宋衛眞)이 다음 국가수석이 된다.
399
기니야가 고천원 남북에서 해동과 조선을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에 대비하여 기니야 정부가 고천원에 접근한다.
401
경휴여단과 기니야정부의 투쟁 종료 선언.
402
7/3 기니야해군이 해동 구축함을 포격.
404
12/9 발해, 시베로 원주민의 민족투쟁에 개입을 정한다.
405
송위진, 산동과 대리에 우리편에 가라고 제안하지만 두 나라는 이걸 거부.
407
고천원, 발해에 군사적 지원을 약속했다.
- 역사는 반복되지는 않지만 각운을 맞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