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옥에서
여기에 온지 도대체 얼마나 지났는지 생각하는 것도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여기는 언제까지나 보잘것없는 풍경만 트이며 아침도 밤도 없기 때문이다.
어둠 바다 속에 바위산이 뿌옇게 보였다. 산을 꿰뚫듯 뻗은 검 같은 바위가 솟았다.
위를 보면 그저 번쩍거려서 땅에 돌멩이나 흩어진 것을 비추고 있다.
나는 때때로 일어나거나 자거나 하고 이 넓은 공간을 산책하면서 영원을 지내고 있다.
이 세상에는 나 밖에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넋은 존재한다. 그래도 이 공간에서 모든 넋을 합친다 하더라도 모래보다 커지지 않겠다.
그런데 남을 우연히 만나는 일도 있다. 이제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지? 나 앞에 불쑥 한 개의 그림자가 일어났다.
"여기가 어딘가?"
"정신차려."
물론 아무나 처음에는 동일한 행동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너는 죽었단 말이야."
"그, 그럴 리가 없어!" 상대는 화가난 소리로.
주위에 뜨거운 열이 생겼고 바람이 올렸다. 남자를 둘러싸듯 아지랑이가 솟구쳤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노르듯 땅을 봤다. 물질과 정신 차이가 분명하지 못한 여기서는 정신의 그냥 현실로 변하는 것이다.
"당황하지 마. 이 세상에선 생각이 그냥 현실이 된다고."
"무슨 일이냐? 나는 죽은 후의 세상 딴 못 믿어!"
"믿을 필요 없어. 네가 보는 모든 것이 진실이라."
새로이 여기에 이사한 자들을 궂는 방법에 익숙해진 나는 넌지시 그가 알게 하기로 정했다.
"여기는 따뜻해? 혹은 추워?"
남자는 잠자코 자기 손을 내려다봤다. 그 손이 천천히 하얘졌다.
"바람이 불고 있나? 땅을 밟고 있나?"
남자는 사나운 모습을 지워 두려워하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무도 말이야. ...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
상대가 사실을 알게 되어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 연옥에 어서 오세요!"
이 세상의 공기는 모든 것을 허무에 빠뜨리고자 한다. 이리 재미없는 곳에서 재미없는 시간을 살아있는 사람으로 지내면 미쳐 마땅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내 몸 - 혹은 나의 넋 - 에 오가는 것은 그에 대한 심한 무관심만.
이 상황에 뚜렷하게 공포를 느끼려면 공포라는 감정을 일부러 뼛속까지 지내야 한다.
살아 있었을 때와 비하면 감정의 기복이 놀랍게 줄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지성조차 툭하면 사라져버리겠다.
감정도 지성도 놓은 채 걸고 보니 나도 모르게 산 같은 지형이 눈앞에 나타났다. 꿰뚫린 구멍에 들어가자 낡은 색깔의 책상과 의자. 호화로운 것이 아니지만.
생각했더니 뾰송뾰송한 종이가 책상 위에. 그리고 펜을 떠올려서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인간은 생과 사를 대립하게 만들지만, 진짜로 그런가?
인간은 태어나면 반드시 죽는다. 그러면, 태어나기 전에 어떤 상황에 있느냐?
태어나기 전에 살지 않으면 허무 사이에 홀로 솟아 있는 삶이 이상하게 아닌가?
죽음이야말로 본질이다. 삶은 죽음에 갑자기 나타난 이상 사태다.
우주는 죽어 있다. 사람도 죽어 있다. 하지만 그 공포도 꺼졌다. 나는 다른 일에 대해 짐작하고 있었다.
내 생각은 책이 되겠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읽고 있다. 다양한 논박과 반론이 있다. 나의 발견은 철학 역사에 남겠는가?
그리고 모든 것이 허무한 상상일 뿐.
살아 있는 동안 생각하지 않기가 어려운데, 여기서는 생각하기가 어렵다. 생각의 과정을 조심스럽게 만들어내야 하니까.
나는 남과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여기서는 다른 사람과 조우하려면 강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남과 조우하고 친하게 이야기를 나뉘는 순간을 머리가 터지도록 상상해냈다.
그러고 보니 눈 앞의 어둠에서 하얀 그림자가 떠올랐다. 나처럼 흰눈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안녕! 오랜만이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일도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인간이 아닌 겉모습으로 변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그것을 기우로 웃는듯 어둠에 따뜻한 빛이 꽉 차기 시작했다. 세피아색 광경이다. 다음에 우리를 삼킨 것은 가는 사무실 안. 깨끗하게 닦은 책상 위에 가지런히 PC가 늘어서 있다.
상대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만지면서,
"이리 본 건 752년만이나?"
"1 주간 전이 아닐까?"
"시간은 이미 잊었거든. 여기선 영원이 한순간이니까."
책상에 가까이 두인 선반 옆에 선 관엽식물 잎을 만지면서 지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간 길이 따위는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그 내용이다... ."
멀리 보이는 풍경은 빌딩이 되자마자 급히 흐리터분한 하늘이 되기도 하더니 꼭 우리가 본 적이 있는 광경이다. 아득한 추억이 떠올라 나타나고 있다.
"내용? 여기서의 살림에 내용이 없잖아."
"맞아, 내용이 없다. 나는 그런 사실을 갓 깨달았다고."
복도에 나가자마자 자동차 도로가 교차하는 대도시 한복판. 아무도 없고 노을만 그리운 분위기로 비치고 있다.
길모퉁이를 나아가던데 우리는 외로운 공허에 섰다. 아까 걸던 광경은 사라져 위에도 아래에도 물의 벽으로 덮여 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이 거꾸로 어디까지나.
"요즘 어케 지내니?"
"별일없이 살고 있지. 책을 읽거나 쓰거나... ."
"일어나도 고생하는데 이상한 놈. 자기만 하는 편이 훨씬 더 편안해."
잠시 침묵.
"그래도 요새 이리 존재하는 것에 싫증이 났어. 영원한 편안함이 나한테 너무나 어울리지 않으니까."
눈앞에 퍼진 물의 벽이 깊어지며 하늘이 밤으로 가라앉았다. 두 경계가 천천히 서로에 녹은 끝에 숱한 우주가 나타났다.
"다시한번 태어나기로 했어. 여기 있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니까."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땅에서 먼지가 올랐다. 내가 놀란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질투라고 살아 있는 사람이 부르던 감정에 틀림없다.
"우주 일부가 될 것이다. 혹시 다시 사는 것도 재미있을지도 몰라. 그때는 싫은 인생으로 여겼는데 이제 떠올리면 의외로 나쁘지 않네."
나는 솔직히 말했다.
"귀찮은 일이다! 물론 여기서의 살림은 재미없어. 하지만 거기서 살면 더 허무하거니와 힘들어."
"그게 좋다! 가신하니까 존재의 뜻을 발견할 수 있잖아."
고요하게 웃으면서,
"난 그렇게 생각하지 못해."
서서히 별빛이 흐리터분해지기 시작했다.
어둠속에서 하얀 얼굴이 옷만 흔들렸다.
"생물에는 죽음이야말로 본질이다. 삶이란 거짓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물은 거짓말인 삶을 진짜로 잘못 여기게 진화했다."
"들었어. 우리는 죽었다. 진짜로 죽기전에 멈춘 채 존재한다고. 근데 거기선 아무것도 없어. 여기 있는 한 나는 사이비 편안함을 떨떠름하게 느끼는 거야."
나는 상대 감정을 덜 이해했다.
"태어난 뒤 뭘 할 건가?"
"모르겠어. 그러나 무언가가 변하겠어. 완전히 동일한 일을 되풀이하는 건 아니야. 그게 좋구나. 비록 사이비 삶이라도 변할 수 있는 것이 있어야 살만해."
친구는 어깨를 두드렸다. 미소를 지었다. 그가 가식적이 아닌 감정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닌지 짐작이 안 갔지만.
"계속 살면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지. 나는 너, 너는 나란다."
우리 둘은 동일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잘 가."
어둠이 그를 소리도 없이 삼켜버렸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끝없는 어둠으로 계속 걷는 중이었다. 사방팔방에서 외롭게 바람이 불어오며 영원히 사람 뼈 같은 색깔의 사막이 눈앞에 트여 있었다.
왜 그러는지 스스로도 몰랐다. 하지만 억지로 하는 일이 아난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는 피곤이 없다. 어디까지나 걷을 수 있으니 하늘에 뜰 수도 땅속에 가라앉을 수도 있다.
빛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내가 보고자 한 것이 아닌데 거기에 있었다.
나도 이 세상의 물리법측 -정신구조 - 을 지실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별이 아니다. 인간의 얼이 들이를 얻은 것이다. 저것도 나다.나를 구성한 넋의 부분을 나는 그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쉽게 몇번이나 목격할 수는 것이 아니다.
이때는 이 세상에서의 시간의 드문 흐름을 느낀 순간일지도 모른다. 아까 함께 이야기한 남자에게 이리 말한 일이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자아를 공유한다고. 그것을 증명하는 순간을 보는 줄 몰랐다.
커다란 어둠이 덮는다. 느릿느릿 안개가 흔들리고 있다.
아무도 들 수 없는 소리를 중알거렸다.
"오늘은 피곤했다."
이 세상에는 어제도 오늘도 없지만 역시 나는 저 세상 개념을 자닌 채 살아 있었다.
다시 잘까. 나는 하얀 모래 위에 누웠다.
그러자 몸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체중조차 가셨다. 어둠도 못 봤다. 이제 나는 자신이 어떤 형편으로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그런 감각 소멸 후 절대적인 편안함.
먼 옛날에 들었다. 영원히 사는 것은 공포라고. 죽는 것은 한순간인데 사는 것은 계속해서 그렇다고.
근데, 이 세상에 존재해보면 과연 영원의 존재를 두려워하는가?
생각의 흐름이 조금씩 멈추게 되었다. 이제 여기 있다고 지각하는데 질렸다. 그저 공간과의 조화가 있었다. 그 조화 속에 나는 하나의 정답을 발견했다.
지각에 피곤하면 자도 된다. 자는데 피곤하면 다시 일어나도 된다고.




